1, 배경
중국 간섭 배제 및 독립 ,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제도 등 개혁 정책을
내 새운 개화파의 주장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1884년 7 월부터 계획을 세워 12월 4일에 정변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청나라 군의 위세와 시대적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써 3일만에 막을 내렸다.
조선 왕조의 쇠퇴와 외세의 압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로 생각되며. 이는 당시 국제 정세와
민족적인 요인이 교차되면서 벌어진 사건으로 판단 할 수 있다.
2, 핵심 인원 -개화당
북학파 –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 개화당의 주요 인물들을 교육시킨 선구자
개화당 : 김옥균 , 박영효 , 홍영식 , 서광범 , 서재필 , 윤웅렬 – 갑신 정변 주요 인물
사대당 : 민영익 , 민승호 , 김홍집 , 김만식 , 어윤중 – 청나라에 의존 보수 세력 ,왕실 및 민씨 세력의 대표적인물
3,개화파의 탄생
노론 북학파의 학통과 정치 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김윤식, 김홍집 , 어윤중등의 문인들을 길러냈고
1870년대 개항기에 와서는 김옥균,홍영식,박영교,박영효,서광범,서재창,서재필,유길준,윤웅렬,윤치호 등 젊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80년대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개항론을 주장하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관계를 가지는 개항 청책을 실시하였다. 북학파였던 박규수,오경석 등은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서양을 야만인 취급하지 말고 기계와 태엽 시계 각종 태엽 기계 등의 제조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 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했다
대원군 정권을 전복하는데 앞장섰던 최익현, 김평묵 등 화서 학파를 필두로 서원 철폐로 대원군을 증오하던 유림 세력, 노론 자체를 부정하던 영남 남인들은 개화파가 나라를 망치려 든다며 한 목소리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을 몰아내고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이 고변에 의해 사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4,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청나라를 통해 서구 문물이 유입되었고 일부 중인층 지식인과 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권리를 요구하는 등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하층민들 역시 자신들도 인간임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학 열사들이 일본의 개화와 미국의 독립을 모범으로 삼아 조선에도 동양 최강국이 될 수 있도록 혁신을 주장했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 외에도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었다. 이런 가운데 단순히 문을 걸어 잠그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각지에서 터져 나왔고 사대부와 지식인층은 조선 정부에 대안을 요구하였다.
5,개화파의 사상적 배경
문명 개화를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리라는 개화사상의 선구자는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들이다. 청나라 학문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직접 받아들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야만인이라고 한들 좋은 점이 있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때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셔먼 호를 불태워버린 장본인이며 1862년 진주민란 때 안핵사로 내려갔던 인물이다. 그는 1872년 청나라에 다녀온 후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갖고 서양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경석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오가면서 새로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실학자이기도 한 김정희의 제자로 금석학에도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오경석은 친구 유홍기에게 자신이 접한 새로운 사상을 전한다. 그이 스승 김정희 역시 연암 박지원의 문하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홍기는 한의원으로 일명 산림정승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그는 비록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학식 ,인격이 고매 탁월하고 교양이 심원한 인물이었다. 한다. 유대치는 관직은 나가지 않았어도 사대부의 신분이었는데 그는 거침없이 오경석을 비롯한 중인 계층과도 허교( 許交 –친하게 사귀다 ) 하던 인물이었다.
오경석, 유홍기 두 사람은 조선을 혁신하려면 양반 자제들을 개화 사상으로 무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김옥균, 박영효 ,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홍영식, 김윤식 등 세도가 집안의 유망한 청년들을 길렀다.
이들이 곧 개화정책의 핵심 세력으로 자라났다.
오늘은 사상적 배경까지 알아보고 추후 추가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 역사로 보면 매우 혁명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으며 현재의 한국은 그 당시의 변화와 노고의 결과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듯하며 시대적인 변화의 강한 욕구가 반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ko.wikipedia.org/static/images/footer/wikimedia-button-2x.png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일 천하, 3일 혁명, 갑신정변을 논하다 ( 3 ) (4) | 2023.12.17 |
---|---|
3일 천하, 3일 혁명, 갑신정변을 논하다 ( 2 ) (11) | 2023.12.10 |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에 대해 알아보자 (87) | 2023.11.28 |
폭포의 웅장함이 주얼 창이 에어 포트를 삼키다. (123) | 2023.11.24 |
“ 존 F 케네디의 위대한 명 연설 “ -그의 생애를 알아보다 (82) | 202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