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2023. 12. 17. 10:46

3일 천하, 3일 혁명, 갑신정변을 논하다 ( 3 )

반응형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빠르게 내부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

이미 만들어진 인사 정책을 다음날 바로 실시를 하는데......

 

한편의 긴박한 드라마를 보는 듯한 짧은 일정에 민씨 세력과의 수 싸움은 점점 열기를 더해 간다 .

참으로 여성의 힘은 대단하다. 역사는 정말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인 듯 싶다. 민심과 그리고

그 민심을 이용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협치가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1.   거사 직후

다음날인 12월 5일(음력 10월 18일) 독립당은 각국의 건설 및 영사관과 영사관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개화파는 인사를 발표하고 영의정 이재원, 사도정 이재선, 병조판서 이재완, 현조판서 홍영식 등 고종의 근친들을 임명함으로써 정부의 군사력과 재정력을 장악했습니다. 영의정 현조판서 윤은률, 전후영사 김옥균, 한성판윤식, 전 영사 박영효, 이조판서, 한성홍문광재학 등이다. 서광범 외교부 장관, 윤치호 외교부 장관, 박영교 외교부 장관, 승정원 도지사를 임명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전위로 공헌한 서재필은 정부의 군사력과 재정력을 장악하기 위해 병조참판과 정신장교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쿠데타에 반대하지 않는 온건한 계몽파였던 김홍집이 한성판윤으로, 김윤식이 예조판서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왕실과 가까운 일부 인사들과 제휴하여 효정 왕후의 조카인 홍승현을 공조판서로 임명하고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일부 교섭하여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의정부 좌찬성 겸 우참찬에 임명하였다. 급진 개화파 만으로는 힘들다고 본 이들은 온건 개화파 일부와 손잡고 왕실과도 손을 잡았다. 신 청부 각료의 구성은 개화파와 국왕 종친의 연립 내각으로 결정했다. 일부 반발이 있자. 개화파 지도부는 새 정부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임시적이라도 종친을 중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 민중들은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일본은 조선에 침투하는 한 방법으로 늘 내정 개혁을 외쳤다. 민중은 개화파의 근대화 정책이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급진 개화파는 급진 개화파 대로 거사를 서둘렀기 때문에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거사의 구성원인 서재필,서재창 등은 모의가 진행 중이던 그 해 7월에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이들이 믿고 있던 조련국의 병력은 하나의 세력을 구성하기 어려웠다.

 

또한 갑작스럽게 일을 추진하면서 급진 개화파는 거사와 민심 동요사태 수습 등에 쓸 자금을 사전에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였다. 또한 온건 개화파를 적으로 돌렸고 척신 세력이나 수구파 대신,혹은 남인 등 타 정파의 인물을 포섭하지 못한 것도 세력 확장에 장해물이 되었다.

 

당시 서울의 상인 빈민들은 개화파에 강한 적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자신의 생활 기반을 위협해오는일본에 밀착된 개화파가 좋게 보일리 없었다.

 

또한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이 침투해서 조선인들을 죽이고 잡아먹는다,

아녀자를 노리개 감으로 삼는다는 유언비어들이 상당히 퍼져 있어

개화파에 대한 반감은 가속화 되었다.

 

개화파의 정책을 지지하는

이는 북학파 출신이었던 일부 유학자들과

일부 외교관과 청나라,만주 ,일본 ,월남 등에 사절로

다녀온 일부 통역관과 수행원들이 고작이었다.

 

명성황후,고종,흥선대원군,민영익

 

2. 민씨 정권과 청나라의 내통

 

정변 직후 입궐하다가 달아난 민씨 세력은 왕비와 비밀리에 연락하였고 민씨 정권의 인사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불바다가 된 도성과 개화당의 갑작스러운 정변에 놀란 청나라 측은 부상당한 민영익을 보고 사태가 발생했음을 확인 12월5일 아침 일찍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왕비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병력 파견을 허락할 것을 제의했다.

 

이로써 청나라 군의 계획을 알게 된 민비는 청군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이어 민비는 고종에게 갑자기 경우궁이 좁아 생활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으로 다시 환궁하자고 했고 고종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파가 이끄는 소수의 병력으로는 미구에 닥칠

역적들에게서 방어하기 극히 불리하다며 안정될 때까지는 반대한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가 없어 고심하다가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쳐를 옮겼다.

 

이재원의 집은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보다는 넓었으나

궁궐보다는 규모가 적은 관계로 개화파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계동국에서도 민비는 계속해서 창덕궁으로 환궁을 요구하였고 왕비의 부탁에 고종은 창덕궁으로 가자고 했다. 김옥균은 병력이 소수임을 들어 방어에 불리하다며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나라군의 공격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1884년 12월5일 오후 5시 고종과 왕비 일행은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민심의 수 싸움이 일단락 성공을 하게 된다.

 

창덕궁 전경

 3. 개화파의 숨가픈 시간

 

개화파는 혁신 정강을 논의하였고 고종이 계동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12월 5일 저녁 진선문 안방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김옥균의 주도하에 좌의정 이재원,우의정 홍역식,서리톡판교섭 통상 상무 서광범 ,병조판서 이재완,좌우영사 박영효 ,병조참판 서재필 ,호조참판 김옥균 ,승정원 도승지 박영교 등이 비상회의를 열고 개혁안을 최종적으로 수정 논의 하였다.

 

이때 결의된 것을 승정원 우승지 신기선으로 하여금 청서하게 하여 홍영식이 국왕에게 상주하였다

12월 5일 자정 권력을 장악한 개화당의 소임 분담은 개화당 대표로 좌의정이 된 홍영식을 정하고 김옥균을 재정과 예산을 군사는 박영효와 서재필이 분담하고 법률과 형벌은 윤웅렬이 맡으며 외교는 서광범과 김윤식, 윤치호가 맡되 김홍집이 협력하고 국왕을 가까이에서 수행하는 것은 박영교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12월 6일 날이 밝자 개화파는 정강 정책을 발표했다.

그 중 14개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청과의 사대관계 단절, 문벌과 양반 제도 폐지,

지조법 개정과 재정기관의 일원화 ,

보부상 단체인 혜상공국 폐지 등이다.

 

빠르게 개화파의 정변 성공은 이루어 지는듯 했지만

사실 3일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3일만에 정변이 수포로 돌아가고 고종의 조서는 바로 폐기되어 본래 이들이 내놓은 개혁 정강의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의 개혁 시책 중 14개 조항이 김옥균의 일기인 갑신일록에 전하고 있다.

 

정변은 실패했지만 그들의 혁신 정강을 알아보고 이번 장을 마무리 하자 .

일본인의 기록에는 80여개의 조항에 달했다고 하니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했지만 정변의 실폐로

조선의 개화는 늦어지고 개화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충족해야 했다.

 

그러면 전해지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나와있는 14개 조항의 내용을 보고 마무리 하자.

 

1.     대원군을 즉각 환국케 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 조공 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고 실력과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와 탐관오리들을 근절하고 궁민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할 것

4.     내시부를 폐지하고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5.     전후 국가에 해독을 끼친 간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 도의  환상미는 영구히 폐지할 것

7.     규장각(왕실 학문 연구기관 &왕실 도서관)을 폐지할 것

8.     일체의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고 그 밖의 중앙 재무관청은 금지 혁파할 것

9.     대신과  참찬(대략 현 국회사무총장)은  매일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 시행할 것

10.  의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할 것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 ( 2층건물 )

 

개화파는 집권 직후 임오군란과 각종 문제의 원인이 된 방납과 선혜청을 폐지하려 하였지만 고종이 쉽게 허락하지 않아 폐지하지 못했다 .

이들의 개혁안 중 하나인 청나라와의 사대관계 단절에는 공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문벌과 양반 등 신분제도 폐지와 과거제도 폐지 조항은 많은 양반들과 과거를 통해 나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지방 유생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또한 규장각을 폐지하자는 주장은 개화파에게 내심 동조하고 있었던 북학파 출신 지식인과 중인 계층에게도 반감을 사게 된다.

많은 난관이 펼쳐지고 그리고 정변의 실패 ,  개화파의 짧은 3일 , 그들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  

 

이상 갑신정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편에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실패의 원인등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ko.wikipedia.org/static/images/footer/wikimedia-button-1.5x.png

 

 

 

 

 

반응형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