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천하 3일 혁명 , 그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내부적으로 고종과 빠르게 혁신 정강을 만들어 결재를 하고 조서를 내릴 무렵,
민씨와 결탁한 청나라 군대가 들이 닥치게 되는데...
마지막 4부에서는 청나라 군의 개입으로 인한 실패와 그 원인과
영향에 알아보고 갑신정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청나라 군대의 개입과 실패
12월 6일 오후 3시경, 고종이 혁신 정강을 결재하고 개혁 정치 실시 조서를 내릴 무렵 ,
청나라 군은 흉노들에게 납치된 왕과 왕비를 구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뒤 ,
마침내 1500명의 병력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창덕궁의 돈화문과 선인문으로 각각 공격하여 들어왔다.
창덕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6일 오후 3시,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바로 그 때 청나라 군이 쏜 포탄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사실 그 전 날인 12월 5일 명성황후는 청나라 총독 위안 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 개입을
요청함으로써 위안스카이는 서울에 남아있던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입을 마무리 한 상황이었다.
.
혁신 정강 14조를 공포하기도 전에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 군사 1600여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여 창덕궁을 공격하였으며 6일 오후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 일대에서 호위 중인 일본군 병사와 싸웠다.
외위를 담당한 친군영 전후영을 담당하는 박영효의 군대는 청나라 군과 응전하였으나 수십 명의
전사자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중위를 담당한 일본군은 제대로 전투도 하지 않고 철병하여 버렸다.
5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함경남도 병마사 윤웅렬 역시 1백명도 안 되는 남병영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쉽게 밀리고 말았다.
이어서 청나라 군이 궁궐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사태가 불리해지자
재빨리 군대를 철수 돌아가 버렸다.
청나라 군대 1500명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개화파의 군사는 사관생도를 중심으로 한 150명에 불과하였고
개화파를 군사적으로 도와주기로 약속한 다케조에 공사의 일본 군대도 쉽게 퇴각해 버렸다.
고종은 박영효. 김옥균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묘로 돌아갔다.
창덕궁의 넓은 지역에서 개화당의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내위만으로는 넓은 평지에서
1500명의 청나라 군을 대항할 수 없어 패퇴하고 만다. 그리고 개화파들은 쉽게 무너졌다.
박영효의 형 박영교, 홍영식은 끝까지 왕의 곁에 남아있다가 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개화파 정권은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그들의 혁신 정강과 왕이 내리려던 조서 또한 휴지가 되어 사라졌다.
2. 실패 직후
홍영식과 박영효의 형 박영교는 고종을 북관종묘까지 호위하다가 청군에게 죽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변수. 정난교. 신응희 . 유혁로. 이규완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인천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 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 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는 이를 알렸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등은
일본 옷으로 갈아 입고 인천 제물포 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선박 지도세마루 호에 잠입했다.
이들을 추격한 묄렌도르프는 승선하려던 주조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숨은 자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 다케조에는 김옥균 일행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말 바꾸기에 분노한 지도 세마루호의 일본인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는 다케조에의
무책임함을 추궁, 내줄 수 없음을 천명하고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묄렌도르프 역시 조선의 외교 고문이므로 일본의 선박은 함부로 수색할 수 없어 퇴각했다.
이로서 김옥균. 박영호 외 7인은 쓰지 선장의 기지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생존한 갑신 정변 주역들은 후퇴하는 일본 병사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다가 인천항의
지도세마루호를 통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날 일본 공사관은 조선 병사와 난민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일본 사람이 학살당하였고
갑신 정변 직후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역모로 규정하였고 갑신정변 주모자들을 대역죄인으로 공표하고
서재창. 이희정. 김봉균. 신중모. 이창규. 이윤상. 오창모. 차홍식. 남흥철. 고흥종. 이점돌. 최영식등을 처형하였다.
국내에 남은 다른 개화파들은 민비 척신 세력에 의하여 철저히 색출되어 수 십명이 피살되고 개화당은 몰락하였다.
관련자로 지목된 김옥균의 처는 관노가 되기 전에 딸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고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효 내외와 맏형 또한
음독 자결하였다.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은 판서직에서 해임된 뒤 투옥 옥사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박원양은 감옥에서 거적을 뜯어 먹다가 굶어서 아사했다 한다.
이후 박정양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상재는 주동자는 아니었으나 우정국의 직원으로 박정양의 후원하에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약한 점과 홍영식과의 친분 관계를 이유로 스스로 사직하고 낙향한다.
3. 실패의 원인
갑신 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 세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턱없이 부족한 준비 기간에다 군사자금의 부족 역시 이들의 거사 실패의 원이 되었다.
또한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할 수 있었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점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다.
이때 처형된 이가 약 6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윤효정은 개화당의 박영효.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사대당의
한반도 천하기로 변화되면서 개화 소장파 570명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유길준은 그저 망연할 뿐이었다 한다.
한편 고종의 소환령을 듣고 귀국하던 유길준은 귀국 직전 일본에 들러 그는 김옥균.박영효. 박중양을 만났는데
한성부에 돌아오자 마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귀국 직후 유길준은 박영효와 김옥균의 은신처를 자백하라며 고문을 당했지만 만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는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정변 관련자인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 홍영식등과 친하다는 죄목이었다. 감옥살이는 면하였지만
그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었다.
유길준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했으나 포도대장이 왕명을 사칭, 집으로 불러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잠을 청했는데 이때 조강하. 이교익이 백방으로 그를 비호하고
나서 죽음만은 면하고 백록동에 감금되었다.
4. 의의
한국 민족이 개혁을 단행하기에 적절한 시기에 나서서 중세 봉건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부패의 요인을 제거 부강한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한
적극적인 자주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시각이 있다.
개화파는 12월 5일 발표한 새 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고대 이후 중국에 반 속국화된 사대교린의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국화 하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왕실 중심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 하되 왕실의 협력을 구하려 하였다.
갑신정변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행위 근절을 목표로 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고려. 조선
속방화 정책에 대한 과감한 저항의 형태로서 일종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본다.
또한 정강의 한에서도 발표하였듯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분제도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과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데에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 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 제정을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이는 종래의 지주제를 인정하되 세제 개혁의 차원에서만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당시 반 봉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인 민중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져왔다.
5.결과와 영향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에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 나라의 조선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 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도 있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이 사대당으로 매도한 이들이 단순히 청나라와 친하자는 세력인지
무조건적 청나라에 사대하자는 세력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개화파도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려는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고
나아가 청나라의 조선 간섭을 심화 시켰다.
게다가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년 4월18일 텐진 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의정했다.
작게는 일본 병사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나라 병사 3천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크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더욱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는 외국 상인은 오로지 일본 상인만 남게 되었다.
1884년12월 말 조선 정부에서는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보내 정변 지원을 추궁하고 김옥균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여러 차례 서신과 특차대신을 보내 같은 주장을 반복하였다.
한편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이 갑신정변을 배후 조종했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관은 불에 타고
공사관을 지키던 서기관등이 살해 되엇다.
이를 빌미로 일본측은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고 배상을 요구하고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였다.
6. 평가와 비판
개혁적인 성향의 관료와 지식인, 청년층이 주도로 일어난 계몽성 혁명이라는 긍정과 민중이 지지기반이
취약한 점과 준비 미숙으로 실패했다는 비판이 양립하고 있다.
한편 개화파의 사상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그 지향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는 평가도 있다.
박은식은 자신의 저서 한국독립 운동지혈사의 제 1장 갑신 독립당의 혁명실패에서 갑신정변을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갑신독립당의 혁명 실패를 한국의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규정하였다.
학자들은 갑신정변이 일부 관료들과 지식인들의 주도로 일어난 거사이며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을
최대의 단점으로 비판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데 있다.
급진 개화파는 농민이나 상인의 지지를 얻으려는 어떤 구체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또 하나 외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들 수 있다.
개화파는 반청 의식만 강했을 뿐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명 개화는 곧 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는데 그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그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정변 실패에 대해 민중들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보는 시각에 따라 많은 이야기가 구구 절절 표현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우리는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 시대를 돌아보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만들고 추구해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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