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메이플라워호에 대해 알아보자 오늘 11월11일은 메이플라워호가 잉글랜드 플리머스를
출발하여 66일간의 향해 끝에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한 날이다.
메이플라워( Mayflower )호 입 출항 및 배경 그리고 그에 연관된 내용에 대해 알아보자
1. 메이플라워호 입 출항
1620년 잉글랜드 출신 이민자 102명을 북아메리카 대륙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까지 수송한 플뢰위트 선이다. 선박의 승무원은 25명~30명선으로 예상되고 이민자 102명을 태우고 영국 성공회와의 갈등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인이다 . 102명 중 약 35명만이 청교도 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메이플라워호는 9월16일 잉글랜드 플리머스를 출발 , 약 66일간의 항해 끝에 같은해 11월 11일 케이프 코드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였다. 선박을 수리한 후 12월 21일 오늘날 매사추세츠 주 연안으로 이동 ,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이듬해
4월5일에 이민자들을 남겨놓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이런 내용으로 보았을 때 무슨 중요한 부분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 과정 중에 발생한 연관된 사건들이 있다. 플리머스 식민지 , 청교도 ,추수 감사절. 메이플라워 서약 등 몇가지 사안이 최초의 미국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있어 메이플라워호가 있었다.
먼저 메이플라워가 출항하게된 배경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위 내용의 중요 연관된 사건들에 대해 좀더 알아보고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2,메이플라워호의 출항 배경
청교도와 종교 문제가 있었던 영국 성공회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가 된 것은 1559년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믿음의 옹호자 “로 인식하여 왕위지상령을 채택하고 반대로 개신교적인 법을 폐지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억지로 창문을 열수 없는 것처럼 종교 문제도 강제로 해결할 수 없다. 라고 판단하여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이 공존할 수 있는 중도적인 종교정책을 지향하였다. 개신교와 카톨릭 간의 종교분쟁을 피하기 위해 타협안을 만들었는데 의식은 카톨릭을 따르되 교리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했다. 또한 매슈 파커캔터베리 대주교는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앙고백”을 제정 영국 성공회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러나 타협안에 반대하며 급진 개혁을 추구했던 청교도는 중도 노선을 지향하는 성공회와 갈등하기 시작했다.
1603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에 대해 큰 기대를 품었다. 그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신자로 교육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통치행위에 유리한 영국 성공회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청교도들은 이에 실망하게 된다. 아울러 엄격한 계율준수와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청교도들은 성공회와 많은 갈등을 야기했기 때문에 종교적 박해가 이어졌다. 결국 잉글랜드에서는 더 이상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청교도들중 일부가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미국)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이플라워호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추가적으로 메이플라워호와 연관된 추가 내용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플리머스 식민지 , 청교도 ,추수 감사절. 메이플라워 서약 등 4가지 사안이 최초의 미국을 만들어 가는데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있어 알아보자
1. 플리머스 식민지
플리머스 식민지는 1620년부터 1691년까지 북아메리카에 개척된 영국 식민지의 선구 지역이다. 최초의 정착촌은 존 스미스 선장에의해 사전 탐사되어 이름지어진 뉴플리머스였다. 이 개척지는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고 현재는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가 되었다. 그 전성기에는 현재 매사추세츠주 남동부의 대부분을 영유하고 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나중에 필그림 파더스로 알려지게 된 종교 분리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버지니아 식민지의 제임스타운과 함께 북미 지역에서 설립된 초기의 영국식민지이며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최초로 상당한 규모의 영구 개척지가 되었다. 또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인디언과 가장 초기의 유혈 전쟁이 된 필립왕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와 합병되었다.
2. 청교도
청교도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핵심인 교황제도 중심주의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순결과 복음 중심주의를 추구하며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개신교도들이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왕권하에서 형성되며 개신교의 정신을 강조한 복음 중심주의자들이 거부하던 서방 교회의 제도 중심주의를 받아들여 부분적인 종교 개혁 사상과 교회제도를 주장하였다. 또한 원형적이고 전통적인 복음주의 종교개혁의 복음주의를 지향했던 기독교인들을 통칭한다.
3. 추수 감사절
추수 감사절은 하나님께 가을에 1년 동안 추수한 것에 대한 감사제를 올린다는 개신교의 기념일로 미국에서는 1년 중 최대의 명절이다. 전통적인 북아메리카의 휴일로 미국의 경우 11월 넷째 목요일에 ,캐나다에서는 10월 둘째 월요일에 기념한다. 유래는 1621년 식민지배를 받던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서 있었던 만찬에 시작 되었다. 청교도인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미국 매사추세츠 주로 이주하였고 첫 수확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토착 원주민이 원래 지내던 축제와 만찬을 즐겼는데 이 만찬이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와 미 대륙 토착 원주민간의 우정과 협력의 상징이 되었고 추수 감사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4. 메이플라워 서약
메이플라워 서약은 일명 메이플라워 계약으로 불리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아메리카에 온 필그림 파더스가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하기 전 체결한 서약서이다.
식민지 사람의 절반은 영국 국교회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요구했던 분리파 집단의 일부였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1620년11월21일에 케이프 코드 주변 현재 프라빈스타운 항구에서 메이플라워 호에 타고 있던 102명의 승객 중 41명이 서명했다.
서약 이유는 메이플라워 호는 당초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서 영국 왕실이 칙허한 땅인 허드슨 강 하구를 목적지로 잡았다. 그러나 긴 여정과 추운 겨울이 닥쳐왔기 때문에 목적지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현재 매사추세츠주에 상륙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이것은 이방인중에서 버지니아 회사가 허가한 영토에 개척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이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아무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불만이 흘러 나왔다. 이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른 식민지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했다. 메이플라워 호의 승객은 1620년 11월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개척자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출항했던 영국의 데본주에 있는 항구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 개척지를 “플리머스”라고 불렀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동시에 다수결 원리 모델을 기반으로 하며 개척자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기반으로 했다. 기본적으로 개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약 규칙과 규정을 준수할 것에 동의한 사회 계약이 되었다.
대략 메이플라워 서약은 아래와 같다.
1. 영국에 충성을 다하며
2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기약하고
3 자치 사회를 형성하여 질서와 안전을 도모하며
4. 평등한 법률을 만들어 관제를 정한 다음 , 여기에 종속할 것을 맹세한다.
상륙 직전에 배 안에서 맺은 메이플라워 서약은 다수의 자유 의지에 의한 정부의 설립을 결정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오늘은 11월11일을 맞아 메이플라워호에 대해 관련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표 , 역사를 말하다 (68) | 2023.11.18 |
---|---|
수에즈 운하 개통 – 1869년 11월17일 개통 (89) | 2023.11.17 |
2극 진공관 발명 -11월16일 역사 , 오늘은 (63) | 2023.11.16 |
마우스의 기원 (2) | 2023.11.15 |
열사 전태일 그는 누구인가 ? (79) | 2023.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