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및 재단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가 및 인권 운동가로 활동을 한 전태일(全泰壹) ,
전태일을 알아보기 전에 전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유서의 전문을 먼저보고
그에 일대기를 알아보자
전태일의 유서 전문
사랑하는 친우여 , 받아 읽어주게 ,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 나를 모르는 모든 이여 ,부탁이있네 . 나를 지금 이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 하여주게 .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꺽어 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위 글에 대해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유서의 내용은 심금을 울린다.
l 전태일 (全泰壹) 신상정보
출생 : 1948년 9월28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
향년 22세 1970년 11월13일 서울 중구 명동 성모병원에서 사망.
묘역 :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본관 : 정선 전씨
직업 : 노동자 . 노동 운동가
1. 개요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 내 삼일 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 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 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 되자 ,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 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다니던 교회와 엠마뉴엘 수도원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중 다시 왕성사의 재단사로 청계천으로 돌아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동대문구청과 서울 특별시의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으나 묵살 당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1970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시위를 주도하였다. 11월 근로 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평화시장 입구에서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 자살하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노동 운동이 재 확산 되었다.
2. 전태일 분신으로 인해 각계 반응
1) 노동계 반응
노동계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다른 여타 공장들에게도 노동조합의 결성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사건은 당연히 노동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이후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 건에 이를 정도로 전년도에 비해 10배 이상의 증가를 보여주었다.
2) 정치 , 사회계의 반응
인권을 존중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한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먼저 대학교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서울대 법대생 백 여명은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 했고 ,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별였다. 11월20일 서울대생, 성균관대생,이화여대생 등과 기타 서울시 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서울대 법과 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가 해산되었으며 고려대,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 시위 직후 서울대 측은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으나 학생들은 철야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기독교 및 개신교 , 천주교 등은 공동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했으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는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3 ) 정치계의 반응
당시 신민당 대통령후보였던 고(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1월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신민당은 노동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3. 전태일의 활동계기와 활동내역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1966년 여름 해고된다.
1966년 8월17일 평화시장 2층 244호에 있는 점퍼,의류 공장인 한미사 재단 보조로 재취업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의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재단사 자리에 올랐다. 1967년2월 초 무렵 하숙하고 있던 집의 딸과 연애도 하였으나 돈 문제 등으로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낀 그는 연애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는 공장 노동자 생활중에도 고등학교 복학을 꿈꿨고 1967년 2월20일 자신의 바지와 하숙방에 있던 곤로를 팔아 연합중고등 통신 강의록을 사기도 했다.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뒤 해설서를 구입해 그 내용을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 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끼고 “바보회”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 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현재의 근로 실태를 조사 하였다 .
“바보회”는 노동자들이 근로 기준법을 공부함으로써 제 권리를 알고 투쟁을 하기보다는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노동환경에 순응한 바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실제 전태일 열사가 살던 시대에 노동자들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열린 야학에 가서 노동법을 배웠고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는 재단회사 신입들과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노동 운동에 본격 투신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처음에는 그를 말렸지만 1969년 6월 아버지 전상수씨가 고혈압으로 별세하면서 아들이 하는 일을 막지 말라고 하여 이때부터는 말리지 않게 되었다.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바보회의 취지에 대해 지금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그의 권고를 기피하였지만 그가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노동자들을 변호하여 해고를 막거나 재 입사 시키면서 그의 바보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와 반대로 그가 죽기 전 1년여 동안 긍정도 있었지만 그에 반해 주변이 냉소와 비아냥 거림 ,노동청과 근로 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 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노동청을 찾아가 근로 환경 개선 ,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했지만 번번히 거절 당했다.
이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1969년 9월부터 1970년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고 이때 그는 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야간에는 노동자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를 하기도 했다.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이라는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 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 노동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이를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히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 해 10월부터는 그는 근로 조건 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했다. 1970년 10월7일 마침내 시내 각 석간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이후 좀더 나아가기위해 근로 조건 개선 거리 시위를 기도하였으나 경비원의 신고로 무산되었으며 , 그리고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태일을 보내야만 했다.
사실 근로 기준법 화형식에 대해 여러 가지 분분한 이야기가 있지만 이 화형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노동개혁의 시발점이자 대중의 이목을 이끌어 냈습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라고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닌 전태일 ,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노동자로서 그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합니다.
2023년 11월 13일 53주년 그의 기념식에 작은 마음 하나 더해 봅니다.
이상으로 전태일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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